오래 전 중학교 때 “참여 예술”이라는 단어를 배운 기억이 있다. 말 그대로 예술이 삶에 참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예술은 왜 삶에 참여하려 하는가? 예술이란 어떤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무언가 고상한 것 같은데 왜 세속적인 삶에 참여하려고 하나? 그리고 참여예술이 있다는 얘기는 “안참여예술”도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이들은 어떻게 구분되나?
예술이란 예술가의 개인적인 생산물이다. 예술가 자신의 생각이나 믿음을 어떤 매체를 이용해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매체에 따라 보통 7개의 예술로 구분한다. 문학 무용 음악 그림 연극 건축 영화.
여기에서 참여란 우선 예술가의 참여를 말할 것이다.
이상화는 이런 시를 썼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는 일제라는 시대에 대한 항거를 자신의 시를 통해 표현했다. 말 그대로 현실에 참여하여 현실을 개혁하고 극복하자는 일종의 행동을 했다. 하지만 직접 뛰어나가는 대신 (물론 직접 뛰어나가기도 했지만) 책상에서 시를 썼다. 행동을 하되 직접적인 행동으로써의 행동이 아닌 자신의 매체를 이용하여 간접적인 표현을 했다.
이런 예술적 행동이 의미가 있는가? 차라리 이런 글 한 줄 쓰는 것보다 태극기 앞세우고 총독부에 수류탄이라도 하나 던지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예술 무용론이 생각난다. 예술은 쓸데없이 헛소리나 지껄이는 것이다 라는.
여기에서 예술에 있어서 두 번째 참여가 중요해진다. 즉 예술가의 참여 행위가 그의 개인적인 행동으로 끝나지 않고 예술적 공감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한 감정을 환기하는 것, 이것이 바로 감상자의 참여이다. 이런 참여를 통해 예술가와 감상자는 동일한 이념 혹은 행동을 공유하게 되고 훨씬 더 큰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결국 예술가의 참여는 감상자의 참여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참여 예술이란 이 두 단계의 참여가 발생할 때 목적을 달성한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힘이다. 직접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고 매우 대단한 행동이다. 하지만 나의 매체를 이용하여 10명에게 또는 100명에게 나를 대신해 혹은 나와 함께 현장으로 뛰어들도록 하는 것은 훨씬 더 의미가 있다. 이것이 바로 참여 예술의 완성된 형태일 것이다.
하지만 예술이 꼭 이렇게 어떤 방향성을 가지는 것만은 아니다. 소위 순수 예술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안참여예술이 될 것이다. 예술이 정치나 사회와 연관되지 않고 순수한 미적인 탐구의 결과로 존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이런 순수한 예술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동물이고 인간의 존재는 사회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나의 모든 행동은 그냥 행동이 아니며 무언가 사회적 의미가 이미 언제나 내재돼 있다. 그러므로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행하는 모든 행동은 이미 사회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순수한 예술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순수하게 상업적으로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순수 예술 작품이 아닌 그냥 생산품이다.) 즉 인간의 행동은 언제나 사회적이고 그들이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 사회적 함유를 포함한다. 예술 작품도 마찬가지로 언제나 사회적일 수밖에 없다. 즉 모든 예술 작품은 참여적이다. 그렇지 않은 것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상업적 생산품이다.
즉 이 글을 시작할 때 던졌던 질문, 예술은 왜 삶에 참여하려고 하나? 이것에 대한 대답은 그게 바로 인간의, 사회적인 인간의 본성이고 예술이란 그런 사회적 인간이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예술이란 본질적으로 참여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