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사람들이 예술이 과연 쓸모가 있나 라는 질문을 했을 것이다. 바쁘고 정신 없는 세상에서 돈 지랄이나 하는 것 같은 예술이라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나?
어떤 사람은 음악을 듣기 위해 스피커 하나에 수 천 만 원씩 하는 것을 산다. 또 어떤 사람은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그냥 흰색 캔버스를 수 억에 구입해 그걸 매일 바라보며 혼자 몽상에 빠진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런데 도대체 언제부터 왜 예술이 이런 효용성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되었나? 그건 예술이라는 장르가 종교로부터 해방되면서 생긴 일일 것이다. 예술이 종교에 속해 있을 때는 적어도 그 기능에 의심을 가지지 않았다. 종교와 생존은 직접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종교와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생존을 추구하면서 예술은 활로를 모색해야 했고 그렇게 찾은 활로가 돈이었다. 소위 예술은 미를 추구하게 됐고 집안을 장식하고 귀를 즐겁게 하고 눈을 즐겁게 하는 돈의 시녀가 되었다.
이런 예술이 지금까지 존재해오고 있다. 짧게 따지면 르네상스 시대 이후, 길게 따지만 인간이 문명을 만들기 시작한 이후 소위 예술의 세속화를 거쳐 예술은 본래의 인간의 삶에 연결된 가치를 상실하고 돈의 시녀가 되었다.
사실 우리 세상은 지금 큰일이 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돈에 의해 가치가 평가되기 때문이다. 소위 자본주의라는 것이 우리에게 돈이라는 새로운 신을 선물했고 돈은 모든 평가의 기준이 되었다.
돈이 많은 사람은 그래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즐기며 행복하게 살 수 있고 돈이 없는 사람은 한 마디로 허당이다. 현대 사회에서 돈 없이 즐겁과 행복하게 사는 것은 어렵다. 다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술이 무슨 가치를 가질까? 그리고 이런 시대에 예술은 어떻게 존재의 당위성을 획득해야 하나?
그 방향 중 하나가 예술치료라는 것이다. 예술활동을 통해 인간의 심리를 치료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개념은 아직도 멀었다. 치료란 의사들의 영역이고 의사들이 예술치료라는 것을 당연히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술치료는 불안감을 감소시키고 우울을 억제하며 스트레스를 줄이고 자살률을 감시소키는 등의 효과를 가져왔다고 보고되고 있다. 그럼에도 예술 치료를 행하는 사람들이 치료자, 즉 의사로써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또 예술치료소라는 장소가 병원처럼 만들어져 있지도 않다.
치료는 의사의 영역이다? 글쎄. 적어도 유럽 사회에 의사라는 존재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길어야 500년이다. 그리고 인간의 존재와 심리는 그렇게 단순하게 의사들이 칼로 자르고 바늘로 꿰매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보다 복잡한 문제다. 예술치료가 관심을 갖는 것도 바로 이 영역이다. 흔히 의사들이 얘기하는 정신과 영역이다. 예술은 이 영역과 원천적으로 깊이 있게 연결되어 있다.
먼 옛날 전쟁을 치르러 나가기 전 밤에 모여 의식을 거행하며 전쟁을 준비할 때 의사들이 그들을 준비 시켰나? 그것은 무당 혹은 신을 대리하는 자 혹은 요새 표현으로 바로 예술가들이 담당하던 역할이었다. 인간의 정신은 예술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예술치료는 사회적 심리적 정서적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의 갈등 문제를 분석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다.
예술치료란 우리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아가야 하는 길이다. 그것이 예술의 본래 기능이다. 예술을 돈의 시녀가 아니라 그 본래 기능으로 되돌려 놓고 우리가 그것과 함께 할 때 보다 건강한 인간이 만들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