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 정해진 운동장

정해진 운동장이란 이미 놀 수 있는 곳이 한정되었기 때문에 뭔가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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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정해진 운동장은 우리들이 흔하게 범하는 오류 중 하나이다. 문제를 풀더라도 문제 밖으로부터 다시 한번 보면 새로운 가능성이 보일 수도 있는데 이미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거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뭔가 얘기를 하더라도 이미 주어진 것들에 대해서만 얘기할 수 있지 그 외 다른 것 혹은 다른 시선으로 뭔가를 하기는 정말 어렵다. 그래서 완전히 벗어나는 새로운 시각으로 사업을 하면 떼 돈을 버는 것이다.

누가 전화기를 들고 다닐 생각을 했을까? 누가 음악을 허리에 차고 다니는 기계에서 재생할 생각을 했을까? 누가 손으로 쓰는 대신 기계로 찍어낼 생각을 했을까? 누가 말하는 걸 쓸 생각을 했을까? 이게 혁신이다. 내부에 머물면서 혁신을 이루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혁신은 언제나 현실을 벗어나야 도달할 수 있다.

어쨌든 우리에게 있어 이 정해진 운동장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우리 역사가 한반도를 벗어나느냐 아니면 그 내부에서 있었던 일이냐에 대한 것이다. 즉 싸움의 장은 한반도로 정해져 버렸다. 우리 역사는 한반도에서 시작됐고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개됐고 맨날 한반도 내에서 싸움질만 해댔다. 이것이 일본놈들이 우리에게 만들어 준 역사다. 그러니까 우리 역사는 처음부터 한반도 내에 머물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한반도 안에 있었고 한반도 밖은 아예 처음부터 생각하지 못했다. 고조선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저 한반도에는 나라 같은 것도 없었고 그냥 동네 몇 개 모여 있던 땅이었다.

일본놈들이 우리 역사가 한반도 내부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교육시켰고 식민사학자들이 그걸 강화시켰고 그 제자들 역시 한반도 내부 혹은 그 주변이라는 역사를 배웠다. 그러니까 이런 교육을 받은 재야사학자들이 반박할 일은 우리 영토가 확대됐다면 어디까지 확대되었었느냐에 대한 것이지 뭔가 다른 완전히 새로운 우리 역사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냥 우리 역사는 언제나 한반도에 머물고 있다. 이것이 바로 반도사관이라는 것이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전라도 천년사 혹은 임나일본부설 역시 마찬가지다. 임나가 가야라고 말하고 있고 그것이 전라도 경상도 어디 어디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이미 오래 전부터 일본놈들이 설정해 놓았고 오늘날 대학교수라는 강단사학자놈들은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여기가 거기고 거기가 저기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싸움은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어느 곳이 맞고 어느 곳이 틀리다에 대해 싸우는 것이지 가야가 근본적으로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얘기가 없다. 그냥 처음에 일본놈들이 가야는 전라도에 있었다라고 말했고 그걸 그대로 배웠고 그 배운 내용 중 전라도의 이곳이 아니라 저곳일 가능성이 있다고 싸우는 것이지 실제 가야가 그곳에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 있었는지는 연구조차 하지 않았다.

누가 가야가 전라도에 있었고 백제가 충청도에 있었고 신라가 경주고 삼한이 전라도 경상도에 있었다고 말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사실로 입증되었나? 이런 질문을 하면 바보 같은 질문이 된다. 왜? 이미 그렇게 됐다고 역사책에 다 기록이 돼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기록된 역사책은 어떤 역사책인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도대체 우리의 어떤 역사책에 그렇다고 써 있나?

그렇다고 써 있는 역사책은 일본놈들이 만들어 놓은 우리 역사책이다. 우리가 기록했고 일본놈들이 새롭게 써놓은 조선의 역사책이다. 게다가 그들은 친절하게 각종 위치를 비정해 놓았다. 비정? 추측해서 여기일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럼 어떤 근거로 비정했나? 없다. 아무런 근거도 없다. 그냥 여기가 거기다. 끝.

조선은 한반도 내부에 존재한다. 끝. 이건 확정된 사실이다. 누구에 의해? 일본놈들에 의해. 왜? 조선은 3류시민이고 쥐뿔도 가지고 있는 것도 없고 말도 더럽게 안 들어서 매일 두드려 맞아야 하고 단합도 안되고 자주성도 없고 아주 병신 같은 인종이 조선인이라고 교육시키기 위해서. 그런데 이런 역사를 아직도 가르치고 있으니….

이미 덧씌워진 굴레, 이미 만들어진 논리 내에서 자꾸 무언가를 하다 보니 재야사학자들의 해석이나 안목 역시 그 안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 밖은 나가보지도 않았고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책을 보더라도 가야가 중국에 있었는지 강원도에 있었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고 그것이 전라도의 이곳이냐 아니냐만 가지고 떠들어댄다. 가야는 이미 전라도에 존재했다고 일본놈들이 써 놓았고 그렇게 배웠으니까.

이거 정말 쉬운 문제가 아니다. 내가 여태까지 배우고 익힌 모든 것들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인데, 대부분의 인간에게 이미 자신이 쌓아 놓은 것을 버리고 새롭게 출발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뭔가 혁신적인 새로운 생각을 떠올릴 수 없는 것이다.

이건 재야사학자들을 비난하기 보다 오히려 이렇게 사람을 가두어 놓은 일본놈들을 욕해야 하고 지금도 자기가 아는 것이라고 우기며 우리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강단사학자놈들을 미워해야 한다. 하긴 강단사학자놈들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그놈들이 제일 불쌍하다. 얼마나 초조할 것인가? 자기가 우기는 일이 무너지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을 수 있다는 절박함에서 그들은 점점 더 악해지는 것이다. 강단사학자들은 이미 흑화 되어버렸다.

정말 일본놈들이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거기에서 벗어나려면 뭔가 완전히 새로운 신선한 시각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미 앞에 언급한 것처럼 기존 강단사학자들이나 재야사학자들을 통해서는 새로운 뭔가가 나타날 수 없다.

그런데 이제 희망이 나타나고 있다. 그건 바로 시민사학자들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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