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호머 헐버트

대한민국 이야기 두 번째 – 100번째를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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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r Hulb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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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여기서 헐버트 박사(Homer Bezaleel Hulbert, 1863~ 1949)에 대해 알아보자. 정말 우리나라를 우리보다 더 사랑했던 진정한 한국인이 그였다.

그는 선교사였고 사학자였고 언어학자였고 당연히 교육자였다. 그는 실질적으로 한국의 독자적인 존립을 위해 그의 평생을 바쳤다. 그는 독립신문 발간을 도왔고 YMCA 를 통해 사회봉사를 실천했으며 한국어 연구와 보급에 앞장선 한국어 학자였다. 그리고 고종의 밀명으로 헤이그 밀사들을 도왔다. 하지만 헤이그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오히려 한국에 입국이 금지되어 미국에 목사로 정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미국에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는 미국 전역과 전 세계의 각종 회의와 강좌에서 일본 제국의 침략을 규탄하였고 한국의 독립에 관한 글을 썼으며, 1918년에는 파리 강화회의를 위한 ‘독립청원서’를 여운홍과 함께 작성하였다. 그는 1919년 3·1운동 후에는 이를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이 주관하는 잡지에 발표하였고, 미국상원 외교위원회에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였다. 1942년에는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국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1944년 그는 ‘한국문제연구회’에서 간행하는 ‘한국의 소리’라는 책자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을사조약 직후 고종황제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아 동양의 역사가 바뀌었고, 미국이 친일 정책을 썼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에 있으면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시각은 어느 정도 옳아 보인다.

만일 미국이 조금 더 멀리를 보고 카스라 태프트 밀약을 통해 필리핀과 조선을 맞바꾸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세계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갔을지도 모른다. 태평양 전쟁 뿐 아니라 그 이후 일본이 세계를 재폐하는 것도 결국 미국 덕분이며 오늘날 중공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결국 전세계가 머지않아 중공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될지도 모르는 것도 결국 미국이 자초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 어떤 나라도 미국을 대체할 수는 없다. 결국 문제는 미국이 얼마나 도덕적인가라는 문제와 연계되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의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현명하고 얼마나 멀리를 보는가와 연계된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상황을 보면 전혀 이들이 현명해 보이지 않고 모든 일을 즉흥적으로 대충 처리하는 것처럼 보여 걱정이 크다. 그것도 아니라면 소탐대실이 미국의 정책을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용어라 볼 수도 있겠다.

다시 헐버트에게로 돌아가자.

헐버트에게는 두가지 소원이 있었다. 하지만 둘 다 이루지 못하고 삶을 마치게 되었다. 첫번째는 통일된 한국을 보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고종의 내탕금을 찾는 것이었다. 고종은 자신의 사유재산인 내탕금중 상당금액을 1903년 상해에 있는 독일계 덕화은행에 예치해 두었는데 이 사실을 헐버트에게 비밀리에 알리며 이를 찾아 대한제국의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할 것을 부탁하였다. 하지만 이미 일제가 이 돈을 불법적인 방법으로 빼돌려서 찾을 수가 없었다.

당시 헐버트는 포기하지 않고 변호사를 고용해 통감부 초대 외무총장 나베시마가 쓴 인출금 영수증을 확인하고 관련 서류들을 모아 진술서를 만든 다음 미국 의회에 제출하는 등 돈을 돌려받으려는 노력을 계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나이가 여든이 넘은 1948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인출경위를 추적한 보고서와 관련 서류 일체를 보내기도 했다. 

1949년 광복적에 그는 우리나라의 초대를 받아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우리 땅에 돌아왔다. 그가 그때 내한했던 목적 중 하나는, 40년전에 일제가 고종황제의 독립운동자금을 불법적으로 갈취했다는 사실을 증거와 함께 널리 알리고, 일본정부에 공식적으로 항의하여 그 돈을 되찾음으로써 고종황제와 했던 약속과 40년전에 그에게 주어졌던 특사로서의 임무를 완수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는 또한 한글과 한국문화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애썼으며 특히 한글 띄어쓰기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도록 한 장본이이기도 하다. 그는 특히 안중근 의사가 가장 존경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뤼순 감옥에서 경찰에게 “헐버트는 한국인이라면 하루도 잊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 관련 15권의 책을 썼고 200편의 글을 남겼으며 “사민필지”라는 최초의 한글 교과서를 썼으며 주시경 선생이 바로 그의 제자이다.

그는 1949년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내한하였지만 오랜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입국 7일만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내가 젊은날 사랑했던 한국땅에 묻히고 싶다”는 유지에 따라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헐버트보다 더 대한제국을 사랑했을까?

그는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을 받았고 사후에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이상 헐버트에 대한 내용은 위키백과 참조.)

어쨌든 이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 당하게 된다. 민비를 죽이더니 결국 고종까지 쫓겨나는 상황이 되었다. 물론 고종이나 민비가 훌륭했냐 나빴냐를 따질 필요는 없다. 어쨌든 그들을 평가하고 상이나 벌을 주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지 다른 나라에서 암살하고 쫓아내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그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개새끼들이 할 일이기 때문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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