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 한국인의 위대함

우리의 가장 위대한 민족 정신의 하나는 3.1운동을 통해 발휘된 단합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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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신채호 선생이 쓴 조선혁명선언의 일부를 보자. (링크를 걸어 놓았으니 꼭 전문을 읽어 보시길.)

강도 일본이 헌병정치·경찰정치를 힘써 행하여 우리 민족이 한발자국의 행동도 임의로 못하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일체의 자유가 없어 고통의 울분과 원한이 있어도 벙어리의 가슴이나 만질 뿐이오, 행복과 자유의 세계에는 눈뜬 소경이 되고, 자녀가 나면, “일어를 국어라, 일문을 국문이라”하는 노예양성소 – 학교로 보내고, 조선 사람으로 혹 조선사를 읽게 된다 하면 “단군을 속여 소전오존(素전鳴尊)의 형제” 라 하며, “삼한시대 한강 이남을 일본 영지”라 한 일본 놈들 적은대로 읽게 되며, 신문이나 잡지를 본다 하면 강도정치를 찬미하는 반 일본화(半日本化)한 노예적 문자뿐이며, 똑똑한 자제가 난다 하면 환경의 압박에서 염세절망의 타락자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음모사건>의 명칭 하에 감옥에 구류되어, 주리를 틀고 목에 칼을 씌우고 발에 쇠사슬 채우기, 단근질·채찍질·전기질, 바늘로 손톱 밑과 발톱 밑을 쑤시는, 수족을 달아매는, 콧구멍에는 물 붓는, 생식기에 심지를 박는 모든 악형, 곧 야만 전제국의 형률사전에도 없는 가진 악형을 다 당하고 죽거나, 요행히 살아 옥문에서 나온대야 종신 불구의 폐질자가 될 뿐이다.

 (중략)

이상의 사실에 의거하여 우리는 일본 강도정치 곧 이족통치가 우리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殺伐)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이건 신채호 선생의 조선의열단 선언으로 1923년에 쓴 것이다. 이 내용을 보면 신채호 선생 같은 사람들은 3.1운동 같은 순진한 행동으로 독립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3.1운동이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일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3.1운동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얻었는가를 볼 때 또한 3.1운동을 이끌었던 대표들을 볼 때 저런 방식으로 우리가 언제나 독립을 얻을 수 있을까가 의문이긴 하다.

우선 3.1 운동 독립 선언문이 낭독된 것은 1919년 3월 1일 토요일이다. 원래는 고종의 국장일인 3월 3일 전날인 3월 2일 일요일에 예정되어 있었으나 장례 때는 사람이 너무 많아 무질서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하루 앞당겨 3월 1일에 거사를 치루기로 했단다.

그리고 원래는 탑골공원에서 낭독하기로 했으나 사람들인 너무 모이게 되면 폭력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한 결과 요릿집 태화관에 모여 대충 눈으로 훑어보고 끝났다고 한다. 이에 분개한 학생들이 찾아와 항의한 후 이 학생 중 누군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읽었다는 것이다. 정말 이 지도자들은 이런 독립선언을 통한 독립 획득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이 중 셋은 아예 친일파로 변절하기도 했다.

물론 3.1운동을 폄훼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 당연히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 중 하나인 것은 너무나 자명하니까. 단지 이 운동이 보다 본격적이었고 보다 강력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만세운동은 3개월간 진행되었고 102만명이 시위에 참가했으며 1542회의 시위가 열렸다. 사망자는 7500명 부상자 16000명 그리고 47000명이 체포되었다. 그 결과 남은 것은? 보다 폭력적 혹은 혁명적인 방법으로 진행했더라면 실제로 그 당시 일본을 때려 잡고 독립을 성취할 수 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처럼 동일한 현상 혹은 사건에 대하여 서로 같은 목적을 공유할지라도 그 방법론에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양한 방법론이 존재할 때 이런 저런 시행착오를 거쳐 더 빨리 원하는 것을 이룰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가 독립하는데 큰영향을 끼친 인물은 장개석이다.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전체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 후 여러 나라들을 독립시키는 것을 어느 정도 찬성했지만 굳이나 그 선언에 한국을 콕 찝어 독립시킨다는 문구를 넣는데 크게 일조한 것이 장개석이란다. 이유는? 그가 한국인들의 독립을 향한 투쟁을 너무나 생생하게 잘 알고 있고 한국이 독립을 얼마나 원하는지 너무나 잘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그는 김구 선생을 매우 존중했고 안중근 윤봉길 등 수많은 조선인들이 자신의 생명을 과감하게 내던지고 적군을 사살한 사실에 매우 감동하고 있었다.

특히 안중근 선생은 일본놈들이 그를 테러리스트 취급을 했을 때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며 대한독립군의 일원으로써 적군을 사살했다고 천명했다. 이런 기개에 장개석이 감동하고 한국인을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 미국 국인들과 함께 훈련받고 곧 한국으로 들어올 젊은 청년들이 있었고. 그래서 아마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지 않았을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독립을 쟁취했을 것이다.

어쨌든 동일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많은 방법들이 있고 우리는 각자의 방법으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3.1운동이 일종의 비폭력 운동이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보다 강력한 독립운동을 요청하고 지지했던 것도 사실이다.

3.1운동 결과로 상해 임시정부가 세워졌고 그리고 일본놈들이 통치방식을 바꾸기는 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소위 문화통치. 그래서 조선은 3류다라고 끊임없이 부르 짓는 교육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쨌든 저렇게 많은 사람이 참가했고 저렇게 큰 희생을 치룬 것에 비하면 소득은 너무 적은게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3.1운동의 가장 큰 효과는 저 만세운동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는 정말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자기만의 독립운동을 시작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누군가는 총을 들고 조선 독립군으로 뛰어 들었고 누군가는 밀정이 되어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연락병 노릇을 했고 또 적지 않은 지식인들은 시골로 내려가 어린 학생들을 교육시키기도 했다.

3.1운동은 여러가지 면에서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고 하지만 조금 더 강력하게 대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어쨌든 3.1운동은 우리 헌법에서도 언급되는 것처럼 가장 먼저 꼽고 길이 지켜나가야 하는 숭고한 우리의 넋임에 틀림없다.

to be continued.